삭은(..) CD 교체하기 & 이상한 습관 이것저것 들으며

1.

1980년대 말, 미쿡으로 출장예정이 잡히셨던 아부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 출장 다녀오면서 CD플레이어라는 걸 한 번 가져와볼까 한다. 기기를 가져오면서
컴팩트디스크라는 것도 함께 가져와볼 터이니 15개 정도만 듣고싶은 음반 제목 적어서 다오. "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마음에도 헉, 스러웠지. 이유인 즉슨 당시 레이저를 쏴 소리를 재생한다는 물건은 신문물 중 신문물이었기 때문. TV등에서 그 신문물을 접하고는 우왕, 멋있당..하긴 했지만 나랑은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라기 보다는, 현실로 체감되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 듯. 당시는 LP 듣던 시대였거든 ㅡㅡa 그것도 내가 직접 LP를 구입할 코 묻은 돈도 없을 때요, 부모님께서 들여놓으셨던 성음 발매 / 도이치그라모폰 50장 박스세트로 연명하던 때였다. 나아가 국내에는 아직 CD플레이어나 CD가 유통되던 때도 아니었고. 그런데 아부지께서, 당신은 음악 안 들으시는(..) 아부지께서 그런 환상 속의 신문물을 가져오신다니, 게다가 말로 듣기만 했던 CD라는 것도 15개나 함께 가져오신다니 급 흥분했다. 게다가 그 선택권을 언니들이나 오빠가 아니라 내게 주시다니!!!

그날부터 끙차끙차, 뭘 가져다 주십사 해야 하나 무지 고민했다.
갖고 싶고 듣고 싶은 음반은 많은데 딱 15개로 한정하시다니 뭘 선택해야 하나 어린 마음에 급 갈등할 수 밖에. 미쿡에 어떤 음반들이 있는 지도 모르겠고 CD라는 건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결국 안전한 선택으로 가기로 했다. 클래식 중에서도 클래식 (ex. 베토벤 9번이라든지;) 을 선택하자. 그 CD라는 놈, 다음에 살 기회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실패없는 안전빵 선택이 낫잖아? 라는 기분ㅇㅇ 지금 기억으로는 15개의 선택 중 베토벤이 가장 많았던 것 같고 쇼팽이랑 차이콥스키랑 라프마니노프랑...또 뭐가 있었더라.

그 15개의 리스트 중 오페라는 4개가 있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바그너의 탄호이저, 푸치니의 투란도트, 비제의 카르멘. 쓰고 보니 이 근본 없음은 뭔지 ㅡㅡ;;;
우얐든 저 CD들이 왔을 때는 증~말 흥분했었다. 이 쬐그마하고 번쩍번쩍한 게 CD라는 거구나. 게다가 오페라는 전곡 레코딩을 가져다 주셔서 투란도트는 2장, 나머지는 3장씩 들었어!!! 벌었다!!! --> 요런 기분ㅇㅇ
저 4개의 오페라 중 카르멘과 투란도트는 다른 레코딩을 구매한 적이 없다. 즉 그 두 오페라는 2017년인 지금까지 저 음반들만 가지고 있다는 것. 내가 주로 파는 계열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지.



2.

세월이 흘러흘러, 그놈들은 여전히 CD랙에 꽂혀있지만 자주 손이 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세상은 넓고 들을 음악은 많고 새로운 레코딩은 우후죽순이니 근래에는 당장 들을 음악 선택하는 것도 일이여. 그러던 2016년 겨울 어느 날, 반 담(쟝 클로드 반 담 아님;) 옹의 아카데믹한(..) 에스카미요를 듣고 싶은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지. 그래서 실로 오랜만에 내 최초이자 지금까지 최후인 카르멘 CD를 뽑아들었다.

바로 요놈. 실로 오랜만이로세. 지금은 단독으로 볼 수 없는 로고하며.
수많은 카르멘 레코딩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을 수 있는 면면들이다.

1976년 레코딩, 1985년 CD 프린팅. DECCA London, 지금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West Germany의 위엄.
세월 참 대단하네, 시무룩..하며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요상한 기미를 느꼈다는 거지. 이상한, 푸석푸석한 가루가 손가락에 후욱 묻어나면서 뭔가 쩍쩍 들러붙는 느낌같은 느낌이;;; ??? --> 이러다가 그게 CD 사이에 깔려있던, 요즘 출시되는 음반에서는 볼 수도 없는 얄팍한 스폰지 완충제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걜 들어내려고 손을 댄 순간 삭아서 가루가 되는 신묘함(..)에 헉, 해서 재빨리 털어냈는데,

삭고 녹은 스폰지의 자태가 저렇게 떠억하니 CD표면에;;;
아무리 오랫동안 안 들었다고는 해도 이건 심하잖여 T_T 가끔 털어주고 닦아주고 햇볕에 말려도 주고(..) 해야 했나, 어으..그래도 이만하면 표면이니 다행이긴 한 건가. 듣는 데는 문제없을 것 아녀.. 라는 생각을 하며 다음 CD 2와 3이 있는 쪽을 열어봤는데,

.....망했습니다, 녜 T_T;;;
CD1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CD2와 3은 녹아내린 완충제가 CD 겉면 만이 아니라 재생면까지 들러붙어 저렇게 삭아 사라져 버렸다. 아래쪽의 까맣게 된 부분은 걍 투명한 플라스틱일 뿐이었긔 T_T;;; 이러면 재생은 커녕 인식조차 안 되는 사태가 발생, 즉 저놈은 더는 음반이 아니라 걍 음반 모양의 플라스틱이 되어버린 거다.
그때 생각했다. 아, 이놈을 다시 구해야겠다. 다른 놈도 아니고 이놈과 똑같은 놈을 다시 개비해야겠구나, 하고.



3.

원체 자주 듣는 음반은 아니었기에 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저 음반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래되서 ㅡㅡa 재발매본은 국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으나 (이것도 흔치는 않다) 내가 원하는 건 재발매본이 아니었다. 딱 저놈이어야 했다. 딱 저렇게 생긴 모양, 저렇게 생긴 구성, 똑같은 연주자들의 1976년 레코딩 / 1985년 서독에서 생산된 CD. 시간이 좀 들어도, 비용이 좀 더 들어도 바로 그놈이어야만 했다. 그렇다는 건 뭐다? 아마존에서 발굴해와야 한다는 거. 하지만 위에서 한 번 썼다시피 세상은 넓고 들을 음악은 많고 새로운 레코딩은 우후죽순이고ㅇㅇ 그리 급하지 않은 음반이었기에 지금까지 미루고 미루고 미뤘다가 지난 5월에 주문하여 어제 날아온 세 꾸러미 중 하나에 저놈을 겨우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제 도착한 반딱반딱한 새 음반. 재발매본 표면에 찍힌 워너 로고 없이 완벽한 그 옛날의 DECCA 레코딩.

문제의 2, 3번 음반도 요렇게 반딱반딱.
그럼 이걸 걍 CD랙에 꽂아놓으면 되는 거냐?
아니지요. 새음반에서 말짱한 CD들을 꺼내 옛날 CD 케이스에 차례로 꽂아넣고, 삭아서 無쓸모인 헌 CD들은 새로 날아온 반딱반딱한 케이스에 넣어 구석에 쳐박아 두는 겁니다. 즉, 그 옛날 아부지께서 사주신 케이스, 그 이후 내 손때가 묻어 낡아버린 케이스와 북클랫에 CD만 바꿔넣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 기회에 상기 음반의 곡 하나 연결해보기. 뭘 할까, 싶다가 걍 흔한 걸로ㅇㅇ





4.

이번 사태를 겪으며 또 한 번 내 이상한 습관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CD를 구할 경우, 무조건 초판본을 구하려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는 걸 나도 안다. 그 옛날이라 내가 모르고 지나갔던 것들, 알면서 놓쳤던 것들을 다시 구할 때 가능한 처음에 출시된 그놈, 그 구성, 그 케이스로 구하려고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 습관이 피곤한 경우가 왕왕 있다. 시장에 물건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요, 있어도 가격이 높은 경우가 허다하다. 구하는데 시간도 걸린다. 그런 놈들의 많은 수가 시간이 흐른 후 가격도 저렴해지고 구하기도 쉬운 재발매본이나 리뉴얼본, 염가본으로 시장에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가능한 배제하고 싶다. 북클렛이 없어, 케이스가 아냐..핑계는 참 많다. 저 위의 카르멘 음반도 그랬었다. 같은 케이스로 나온 재발매본이 있었는데 전면에 찍힌 워너 로고를 보고 마음 접었었다. 북클렛도 그대로는 아니었던 것 같고ㅇㅇ 사실 이 핑계도 웃기는 거지. 저 카르멘 음반에서 필요한 건 달랑 CD 뿐이었는데. 케이스도, 북클렛도 초판본이라 낡았지만 완벽히 갖춰져 있었으니.

도무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솔직히 음질이나 기타 등등이 다를 리가 없잖여.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걸 굉장히 거슬려 할 정도로 귀신같은 음감의 소유자도 아닌데 어이하여. 똑같은 연주자의 똑같은 녹음이 다만 껍데기만 다르고 구성만 달리 새로, 저렴히 나오는데 왜 그때마다 어렵게 만드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때마다 약간의 현타를 맞게 되는 거지. 이건 음악을 듣기 위한 거냐, 아니면 걍 그 음반을 갖고 싶은 컬렉터 기질이라는 거냐. 만약 답이 후자라면 그건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는 거잖아. 별 것 아닌 이 고민을 한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나마 CD가 생산된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아 다행이려나 싶기만 하고.

뭐, 이런 거ㅇㅇ
취미의 영역이라 답이 있는 것도 아니요 나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건데 가끔 오는 현타는 어쩔 수가 없는 듯.
어제 저 음반을 받아들고, 이 포스팅을 써내려가다가 컴도 끄지 않고 고꾸라져 자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 오늘 " 이라는 단어를 " 어제 " 로 고치며 출근 하자마자 마무리져 본다.



5.

새로운 DAP 가 갖고싶다(..)


덧글

  • Citadel 2017/06/13 20:52 #

    CD가 변색된 걸 보고 헉 했습니다.. 마음 아프셨겠어요ㅠㅠ 뭔가를 모을 땐 초판본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ㅎㅎ 뭐든 원조나 오리지널이 좋아 보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어렵게 구한 물건일수록 더 애착이 가더라구요ㅎㅎ
  • der Gaertner 2017/06/17 11:42 #

    그죠!!! 분명히 그것만의 매력 & 가치가 있는 건 사실인 듯요. 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 휩쓸리는 기분을 너무 자주 느껴 지치는 기분입니다.
    .....여러모로 득도가 필요합니다 T_T;;;
  • CelloFan 2017/06/14 10:25 #

    음 저도 처음엔 워너 로고에 익숙치 않아서 힘들었는데, 이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로고가 바뀐다고 해서, 오리지널 커버가 아니라고 해서 음악이 바뀌는건 아니니까요. 결국 지금은 워너 재발매반들 그냥 사고 있어요. 저도 슬슬 80년대 구입한 CD들이 위험하긴 한데, 집이 건조해서인지 가끔 열어보고 재생해보는데 문제는 아직 없더라구요. 언제까지 CD를 사게 될지, 언제쯤이면 고음질 음원 혹은 스트리밍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될런지, 또 그때는 정말 다시 바이닐 라이프로 돌아가게 될지 아무것도 알수 없지만, "음악을 듣는 즐거움" 만 잃지 않으면 그게 고음질 음원이든 라디오 방송이든 상관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결국 물리적 미디어에 대한 소유욕을 얼마나 컨트롤하느냐가 문제겠지요. (이러면서 저는 또 음반을 주문하고 있네요)
  • der Gaertner 2017/06/17 11:40 #

    말씀하신 대로 다른 음악이 아니라는 것, 그 음악이 분명하다는 걸 머리로는 분명 아는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이 안 따라준다고 해야 할까요. 참 잊을 만하면 떠오르게 하는 뭣한 상황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어서 애매합니다.
    그중 가장 문제인 건 역시 말씀하신 소유욕인 듯요. 이놈의 물욕은 당최.. T_T 여러모로 득도하고 있습니다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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