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라리 : 크레이프 케이크 , 내 안의 스탠다드 이것저것 먹으며

케이크에 대한 내 기준은 1990년대, 카페 라리의 케이크를 먹기 전과 먹은 후로 나뉜다.
실은 카페 라리 케이크를 먹기 전의 데코레이션 케이크(..라고 말해도 되나;)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기억나는 걸 꼽아 봤자 케잌하우스 윈이나 케잌하우스 엠마 정도. 그 밖에는 크레용 맛의 유사 크림을 잔뜩 씌워 크림을 걷어내고 먹어야 하는 케이크 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때 카페 라리의 케이크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맛은 당연하고 당시 조각당 4,000원(!!! .....4,400원이었던가;)의 가격 역시 충격이었지만 언니 뒤를 졸졸 따라 신사동 or 예당 쪽 카페 라리를 갈 때는 가 본 적도 없는 축제 가는 기분이었다. 아, 당시 홀사이즈 케이크는 40,000원 대의 어마무지한 가격(..)이었는데 아부지 생신 때 가져온 홀사이즈 쉬폰 케이크 위에 흐드러지게 뿌려진 은색 아라잔의 영롱함은 어떻고. 참고로 4,000원 or 40,000원의 가격은 1990년대 물가임을 감안해야 함. 1990년대 생인 분들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분위기를 떠올리시면 될 듯. 난 응답하라 시리즈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말이지ㅎㅎ

그 대단했던 카페라리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도와 기타 등등의 부침을 많이 당했다지.
그런 부침을 말해주는 듯 매장은 당당한 대로가 아니라 구석으로 숨어들었고 30년전 그대로인 케이크 메뉴는 변함이 없다. 90년대의 우월한 명성은 세월 앞에서 색이 바랬고 요즘의 케이크 들과 비교하면 올드하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을 듯. 하지만 3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케이크 한 가지로 승부한 명맥이 아직 끊기지 않은 것은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일 듯. 그리고 그 세월 동안 여타의 케이크를 먹어본 나 역시 몇 가지 케이크는 카페라리의 그 옛날 케이크가 비교구일 때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크레이프 케이크다.
요즘 크레이프 케이크 전문점이 많이 생겼고, 많은 케이크 점에서 크레이프 케이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거기에 베리에이션은 어떻고. 초콜렛, 에스프레소, 코코넛, 과일...수많은 변형 크레이프 케이크가 존재한다.
이에 반해 라리는 여전히 단 한가지 크레이프 케이크만 만들고 있다. 바로 생크림 크레이프 케이크ㅇㅇ 그 올드한 라리의 생크림 크레이프 케이크가 내게는 크레이프 케이크의 대표단수이자 스탠다드다.

이번 추석 연휴를 맞이하야 한때 아부지의 최애 케이크였던 라리의 크레이프 케이크를 한 번 들고와봤다. 조금 걸어가야 하긴 하지만 근처에 매장이 있어서리.
.....라기 보다는, 다른 걸 가져오고 싶었는데 연휴 전날이었던 금욜 퇴근길, 집에 들고올 짐이 심히 많아 어딜 갈 수가 없었으요 T_T;;; 결국은 집에 짐을 두고 저녁을 먹은 뒤에 운동 삼아 걸어갔다 온 게 카페 라리ㅇㅇ 게다가 가져올 수 있는 홀사이즈 케이크는 크레이프 케이크와 초콜렛 쪽 & 치즈 쪽 뿐이라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는 게 참트루;;;
그래서 오늘은 빼박 카페 라리의 크레이프 케이크다.

포장조차 고색창연하다. 고풍스러운 보라색의 리본 & 여전한 La Lee 의 로고. 박스를 열어보면,

이놈이 라리의 시그니처이자 단 한 가지 종류로 밖에 안 나오는 크레이프 케이크다.
어떤 꾸밈도 없는 밋밋한 자태. 요즘 다른 크레이프 케이크들은 위에 뭐라도 올려놓거나 그려놓는데 그런 거 1도 없다.

하지만 그 밋밋한 상단면은 촉촉한 시럽이 스며든 것 같다. 나파쥐나 시럽 등이 끈적하게 얹힌 것도 아니요, 손으로 만지면 촉촉한 물기만 살짝 스며나오는 느낌.

크레이프 케이크 특유의 너불너불 옆모습. 이쪽 역시 찐득함이나 그리지한 느낌 1도 없다.

사이즈는 요 정도. 2호 사이즈인가...싶은데.
재미있는 건 내 기억 속의 기본 홀사이즈 라리 케이크는 이보다 훨씬 컸다.
뭐, 요즘도 주문을 하면 4호 사이즈를 만들어주긴 하는 듯.
단면을 봅세.

대충 세어보니 17장의 크레이프와 생크림의 조합인 듯.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균일 & 얇게 쌓았을까의 의문과 함께 케이크 중 가장 만들기 쉬운 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이건 제과에 대해 1도 모르는 무지한 자의 감상일 뿐ㅎㅎ

이런 놈을 오늘의 커피와 함께 먹어주는 거지. 오늘의 원두는 인얼스 커피의 에티오피아ㅇㅇ
그리고 저 크레이프 케이크의 맛은 어떤고 하니.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내 안의 크레이프 케이크 스탠다드.
촉촉하고 부드러운 크레이프와 그 안에 첩첩이 스며든 크림의 습기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포크로 잘랐을 때 삐져나오거나 질긴 면 하나 없이 부드럽게 잘려나간다. 거기에 흐를 정도로 질척하지도, 텁텁할 정도로 오버휘핑도 되지 않은 생크림 역시 기준삼을만 하다. 냉장케이크임을 선전하던데 냉동케이크 특유의 묘한 푸석푸석함이 좀 덜한 것 같기도 하고ㅇㅇ
어떻게 보면 슴슴하다, 싶을 정도로 단맛이나 자극적인 뭔가가 없어 그런 맛을 원하시는 분들께는 미흡하게도 느껴질 듯 한데 내 취향에는 부합. 적당한 달달함과 촉촉함과 부드러움, 거기에 기분 좋을 정도의 쫄깃함을 가진 클래식한 크레이프 케이크라고 보시면 될 듯.

남녀노소 절~~~대 취향탈 일 없는 클래식, 그 자체.
단 기분에 따라 강한 단맛 등등을 원할 때에는 살짝 미흡할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단 게 땡길 때 이놈을 떠올리진 않을 것 같거든ㅎㅎㅎ
오랜만에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먹은 케이크.
추억은 언제나 미화된다지만 이놈은 여전히 그 안의 스탠다드로 매김하고 있었다.

덧글

  • 2018/09/22 12:3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9/29 11:2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sarah 2018/09/24 02:59 #

    저도 라리케이크가 단거 인생의 전환점이라 반가워요. 딸기치즈케잌 참 좋아해서 후덜덜한 가격에도 인생의 낙이었어요. 진짜 추억이네요.
  • der Gaertner 2018/09/29 11:22 #

    그런 형태의 딸기 치즈 케이크도 제 기준 국내에서는 라리가 최초였던 듯요.
    당시 참으로 특별한 케이크들이자 케이크 전문점이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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